에어컨이라는것은 은행에 가야만 볼 수 있던 시절, 더운 여름날 부모님은 선풍기에 대해서 항상 경고하셨다.
" 잠잘때 선풍기를 틀어놓고 잘때는 제일 약하게 틀어 놓고 항상 회전시켜놓고, 타이머 걸어놓아야 된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밀폐된 방에서 선풍기 틀어놓고 자면 죽는다." 라는 명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과거에는 정설로만 여겨지던 이 명제가, 요즘에는 도시전설이라는 이름으로 미신으로 취급받고 있다.
국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엔하위키의 해당 항목을 살펴보자.
http://angelhalowiki.com/r1/wiki.php/Fan%20Death
"선풍기 사망설은 밀폐 된 방에 전기 선풍기를 밤새 켜 놓아 두면 (질식, 중독, 저체온증 등으로) 죽을 수 있다는 남한의 도시 전설이다."
"이런 선풍기 죽음이란 낭설에 대한 믿음 때문에 무엇이 사망을 야기하는지 정확한 매커니즘을 알아내려는 여러번의 설명이 있었다. 하지만, 아래에 서술하듯이 이러한 믿음은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인 근거에 바탕해 있지 못하다."
주한미군에 새로 전입오는 병력들을 위한 안내서에도 "한국인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확고하게 믿고 있으므로, 만일 카투사 병사와 같이 방을 쓰게 될 경우 밤에 문을 닫고 선풍기를 틀지 말고 배려해줄 것" 이라고 씌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글을 읽다보면 "혈액형 미신" 처럼 선풍기 미신을 믿는 사람을 바보취급하고 있다.
당연히
라는 명제는 틀린 명제이다. 이 명제가 맞기 위해서는 (그리고 실험에서 이 현상이 재현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높은 확률로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면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그럴리가 없잖아!!!
간혹 선풍기 미신이 "밀폐된 공간에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면 저산소증으로 죽는다." 라고 정의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도 이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위의 엔하위키 링크 참조)
선풍기를 틀었는데 왠 질식사?
하지만 ..
"몸이 약한 사람이 술에 취해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면 저체온증으로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
라고 명제를 바꿔보면 어떨까? 실제로 선풍기 미신에 관련된 글이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올 때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선풍기 틀어놓고 자다가 몸에 마비가 오는것을 느끼고 겨우 겨우 선풍기를 끄고 잔적이 있다.." 와 같은 경험담이 댓글에 달리고는 한다.
자 다음과 같은 가상의 상황을 가정해 보자.
김모씨(53세)는 아내와 이혼 후 혼자 살면서 매일 매일 술에 쩔은 삶을 살고 있었다. 잦은 과음과 비만으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그날도 소주 5병을 비운후, 열대야로 더운 여름날 저녁 언덕위 집까지 걸어 올라갔을때에는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
이후 만취 상태에서 허름한 단칸방에 도착한 김모씨는 씻지도 않고 선풍기를 "강"에 맞추어 틀어 놓고는 쓰러지듯이 바로 잠에 들고 말았다.
땀에 절었던 옷 때문에 체온도 급격히 떨어진 상태였던 김모씨는 새벽무렵 비가내리기 시작하면서 기온이 선선하게 느껴질만큼 떨어졌지만 만취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였으며, 마침 심장도 좋지 못하던 그는 끝내 저체온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그를 찾은 이웃들은 그의 시신 옆에 돌고있는 선풍기를 보면서 역시 선풍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을 하였고, 신문의 구석에는 또 작게 "선풍기 사망"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잔다고 해서 100% 죽는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만취상태의 취객이 겨울날 길에서 자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죽는것과 마찬가지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음 + 술에 취함 + 선풍기" 의 조합이라면 충분히
사망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만취가 될때까지 술을 마시는것을 좋아하는 음주문화를 가진 나라에서는 선풍기를 틀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사람이 1년에 몇명쯤이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역으로 선풍기 때문에 죽었다고 볼 수 있는 경우..)
누군가 "나는 심장이 상태가 안좋은 사람인데, 소주를 만취할때까지 마시고 온몸이 땀에 젖은 상태에서 선풍기를 "강"에 맞추어 놓고 정면으로 틀어놓고 잤지만 지금 멀쩡하게 이 글을 쓰고 있다."
라고 댓글을 달아준다면 이 의견을 철회할 생각이 조금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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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더워서 선풍기 틀어놓고 (물론 타이머는 세팅해 놓고) 잘라다가 생각나서 한번 써본다.